사실주의 회화가 묘사하는 생물이 지닌 생동감은 그 차가운 사실성으로 인해 인간사의 이야기가 끼어들 틈 없는 무정한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동시대의 화두로 떠오르는 인공지능이 학습하여 생성하는 생물의 모습은 반복된 형상의 실루엣과 비율, 색과 잘게 쪼개진 명령어로 이루어져 있을 뿐 생물이 생존 본능이나 감정을 지녔기에 뿜어내는 변덕과 종의 지속을
위한 희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이 그린 세상은 작가의 생각이나 당시의 심경을 반영하며 때로는 의도와 의미가 없는
건조한 순간의 박제에도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불어넣는다. 딱딱하게는 인간의 존재를 지속시키는 사회성이고
문학적으로는 공감능력이라 불리는 요소로 인해 이야기는 시간을 넘어 확장된다. 물론 기분을 뜻하는 단어들도
표정이나 신체 동세에 대한 누적된 학습으로 단편적이거나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복잡미묘한
사람의 속내와 감정은 담아 낼 수 없고 생성된 이미지가 어떤 명령어를 포함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나서야 감상과 해석을 결과에 끼워 맞추게 된다.
하지만 김영성의 작품은 생동감을 재현함에 있어 자극적이고 시끌벅적한 몸부림이 아닌
지독히 고요한 침묵과 느린 맥동으로 엮어낸다. 고행, 인내, 적절한 시점에 작업을 마치는 완성도 그리고 다시 침묵. 작가의 작품은
기계에게 형상안에 담긴 단어를 내어주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물을 무생물로 칭하는 우직함의 이면은 애초에
생물이 아닌 존재로 예술가의 생각을 훔치고자 하는 성급한 욕망이 무색하게도 텅 빈 순수의 상태일 지도 모른다. 그
빈 곳에 자리한 것은 대단한 첨단 비법이 아닌 우리가 성장하며 도외시했던 작지만 분명히 끈질기게 살아온 존재들이다.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은 온도에 민감하고 영역본능이 강한 특징을 지녔다. 작은 미물이 뼛속에 약속된 삶을 충분히 살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편안함은 생물을 보듬으면서도 나약하게 부식한다. 환경과 생물이 적응이라는
이야기로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모순을 통해 김영성은 생물 중에서 작은 존재들을 조명하며 동시대 인간의 희로애락이 담긴 초상을 비춘다. 자연을 모방하여 계산되었지만 경계의 끝이 분명한 자유. 투명하지만
닫힌 공간에 길들여진 생물은 때로는 오늘날 기술의 우울을 메고 도시와 디지털 공간의 틈에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편안하기 위해
쌓은 사회의 구조물은 높게 쌓을수록 인간성에서 멀어져 왔다. 소통의 도구는 엄지손가락으로 밀어 넘기는
작은 화면 속 찰나의 화려함으로 달콤히 뇌를 간지럽힌다. 플라스틱의 효율이 버리고 지나친 작은 확률과
비효율, 느림과 결함이 지닌 모든 아름다움을 팔레트에 담은 김영성은 인간이 지닌 창조와 모방의 불완전함과
끈질긴 지구력으로 앞서 이야기한 생략되고 무시된 것들을 위로하며 헌사한다.